인삼의 효능과 가치를 알아보고 건강 비법은 물론 통치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한 군주들의 이야기.
-
-
영조의 건강 공신 ‘건공탕’이란?
조선 영조는 83세의 장수를 누리며 임금 자리에 무려 52년(1724~1776)이나 있었다.
평생 생사를 넘나드는 질병을 앓아본 적이 거의 없었고 66세의 나이로 16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했다. 이러한 그의 건강을 지킨 것은 ‘건공탕(建功湯)’이었다. 인삼, 백출, 말린 생강, 감초를 달인 이중탕(理中湯)에 인삼(산삼) 두 돈(7~8g)과 좁쌀을 넣어 마셨더니 통증이나 피로 등의 증세가 사라졌다. 이에 영조는 이것을 “이중건공탕(理中建功湯)이라 부르겠다”며 직접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규칙적인 식생활과 더불어 이중건공탕을 하루 2~3차례 마셨는데, 허리와 아랫배의 잦은 통증에는 하루 네 번 올렸다는 기록도 있다.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하고 밤을 새워도 피로를 몰랐던 건 건공탕 덕분이다. 신하들과 〈건공가〉를 시로 읊기도 했다. 영조가 소비한 인삼은 1년에 거의 20여 근(7~8kg)이었지만 “나는 인삼의 정기를 얻었다”며 인삼의 효능에 만족했다. 관복이 해질 때까지 입고 가마도 거의 타지 않을 만큼 근검절약한 왕이었지만, 영조의 인삼 사랑은 조선 부호들의 인삼 소비 심리를 부추겼고 인삼 부족 현상도 심화시켰다.
홍삼으로 수원 화성의 번영을 꿈꾼 정조
정조는 “국가 재정은 백성과 나라의 근본으로 이를 바로잡아야 정치를 해나갈 수 있다”며 재정 운영의 공공성을 높이려 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이 홍삼이었다. 특히 수원 화성 건설은 정조의 정치적 야심이 담겨 있었다. 공사에 동원된 인부에게 임금을 주었고 토지를 수용했다. 공사를 마친 이후에도 신도시 번영과 민생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이를 위해 특별한 재원이 필요했고 그 중심은 홍삼이었다.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라.” 정조가 내건 미래 비전 아래 수원 화성을 발전시킬 방안을 모색했다. 서울에서 이주하는 부자들에게 인삼 판매권을 주었고, 엄격하게 금지했던 홍삼 무역을 공식화했다. 인삼의 밀수출을 막기 힘들다면 차라리 세금을 걷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역관과 사신이 출장길에 은(銀)과 삼(蔘)을 가져다 팔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기서 인정한 인삼은 가삼(재배삼)을 쪄서 만든 홍삼으로 ‘포삼(包蔘)’이라 불렀다. 이에 대해 거두는 세금을 ‘포삼세(稅)’라 불렀다. 밭에서 길러낸 인삼을 홍삼으로 만들어 국가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한 것은 정조 때부터였다.
-
-
베트남 민 망 황제의 고려인삼 사랑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제2대 민 망 (1820~1841) 황제는 오늘날 베트남이라는 국호의 어원이 되는 한자명 월남(越南)이 청나라에서 승인한 이름이라면서, 국명을 다이남(大南, 북쪽에 중국이 있다면 남쪽에 베트남이 있다는 뜻으로 중국과 베트남이 동등하다는 의미) 으로 바꿀 만큼 개혁적인 군주였다. 민 망 황제에게는 여인들이 많았다. 모두 142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아들이 78명 딸이 64명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는 항상 인삼이 있었다. 특히 고려인삼에 대한 그의 욕구는 남달랐다고 한다. 민 망 황제는 1830년 베이징으로 가는 베트남 사신에게 “중국 황제가 베트남 사신에게 주는 희사품을 절반 가격에 되팔아 그 돈으로 인삼을 사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민 망 황제 때부터 베트남 상인의 무역 활동이 매우 활발해졌는데, 1840년 아편전쟁으로 교역이 어려워지자 민 망은 “이제 약재를 어디에서 구하겠는가?”라며 염려했다고 한다. 약재에는 조선에서 나는 고려인삼이 포함돼 있었다. 민 망 황제는 고려인삼을 관료와 학자에게 선물하고 무관들의 충성심을 고취하기 위해 하사 하기도 했다. 고려인삼으로 유교적 이념인 충과 효를 이끌어내고 동시에 황실에 대한 위엄을 진작시키는 재료로 활용한 것이다.
Health Secrets and Means of Governing Monarchs who realized the value of ginseng
King Yeongjo, the 21st king of the mid-Joseon Dynasty, reigned as king for 52 years in his life of 83 years. He never suffered any serious illness and even married a young bride of just 16 when he turned 66. He was said to have shown no signs of fatigue even when he held meetings with the courtiers until late and stayed up all night. In addition to his regular diet, King Yeongjo drank Korean traditional medicinal decoction containing ginseng two to three times a day. King Yeongjo consumed 7 to 8 kg of ginseng a year. While he was thrifty and frugal enough to wear an old official uniform and rarely rode the palanquin, his love for ginseng encouraged the rich people of the Joseon Dynasty to consume ginseng and intensified its shortage. King Jeongjo, who achieved economic and cultural revival succeeding King Yeongjo 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focused on correcting the national Finances. He set his political ambitions to the Suwon Hwaseong Fortress construction project. It required special financial resources, and red ginseng was at
the center. King Jeongjo gave the right to sell ginseng to the rich immigrating from Seoul, formalized the formerly banned red ginseng trade, and collected taxes. From then on, ginseng grown in the Field was made into red ginseng and added to the national Finances. Minh Mang, the second emperor of the Nguyen Dynasty, the last Vietnamese dynasty, was a very reformative monarch. He had 142 children, 78 sons and 64 daughters. He especially valued Korean ginseng. He even ordered to sell gifts from the Chinese emperor in the 19th-century tribute trade with China at low prices and buy ginseng with the money. Vietnam’s trade has been active since the time of Emperor Minh Mang. The emperor was said to have struggled to !nd Korean ginseng when the nation’s trade became difficult due to the Opium War in 1840. He also gifted Korean ginseng to government officials, scholars, and soldiers to inspire loyalty. He aroused the Confucian ideology of loyalty and filial piety with Korean ginseng and raised the dignity of the imperial family.